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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로그/책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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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1864년에 자유, 책임 및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최초의 실존주의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지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썼다. 니힐 리스트사회주의자혁명가에 대한 사회적 비판 및 풍자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심리적 통찰력을 가진 소설이라고 한다.

지식이 짧기에 사상, 러시아 배경 등은 지식이 짧기에 배제하고 읽었고 이후에 서치하며 적게 되었다. 유명한 도입 문구는 아래와 같다. 제목과 잘어울리는 구절이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주인공 나는 위와 같이 말그대로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파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만만 터뜨리는 부정적 인간으로, 생각이 많아 불만도 많고 두려워 한껏 웅크려있는 느낌이다.

1부 「지하」 에서의 나는 지하실에서 혼자 횡설수설 독자에게 떠들다 끝난다. 대부분 공리를 표방하는 선에 대한 존재는 그 자체로 위선이라는 태도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서 표현된 이상들-60년대 급진세력-을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그 세력이 은폐하려고 하는 다 같이 잘살기 위한 방법을 소외받는 그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대변하기 위해 외친다 하면서 말하는 입장과 듣는 입장을 차마 나누지 못하는 그들만의 눈먼 권위는 현재에도 존재하는 듯하다. 이와 같이 표방하려는 목적과 실제 나타나게 되는 결과, 실제 의도 등에 대한 모순은 분열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과도 닮았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현실을 너무 사랑하여 진심을 가진 일원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될 수 없기에 오히려 혐오하는 모습으로 지하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세상이기에 주인공이야말로 진짜 정상인지도 모르겠다.

2x2=4는 이미 삶이 아니라, 여러분, 죽음의 시작이 아닌가. 적어도 인간은 늘 어쩐지 이 2x2=4를 두려워해 왔지만, 나는 지금도 두렵다. 인간이 하는 일은 오직 이 2x2=4를 찾아 대양을 항해하는 것뿐이지만, 또 이 탐색의 과정에서 삶을 희생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그걸 찾는 것, 발견하는 것은 맹세코 어쩐지 두려워한다. 실상 그걸 발견하고 나면 그땐 더 이상 찾아 헤맬 대상이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직감하는 것이다.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 에서의 나는 아주 처참하다.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각각 주인공 혼자 이상한 열등감으로 쇼하다가 그들(매춘부 리자를 제외하고)로부터 무시당하게 된다. 읽는데 주인공의 괴상한 행태로 인해 괜히 그와 같이 있는 것 같아 창피하다. 조금의 항마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죄와 벌>(1866)에서와 같이 매춘부로 인해 지상으로 구원받을(탈출할) 기회가 찾아오지만 거부하고 지하로 다시 들어간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령 내가 지하의 구석방에서 정신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환경의 결핍을 맛보며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허영심 가득한 분노나 키우고 그럼으로써 정작 삶을 놓쳐 버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맹세코 재미없는 일이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반(反)주인공에게나 걸맞은 특성만 몽땅 모아 놓았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 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나 많이 유리되었는지 진짜 ‘살아 있는 삶’에 대해서는 때때로 어떤 혐오감마저 느끼고, 또 이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이걸 상기시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다. 실상 우리는 ‘살아 있는 삶’을 노동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거의 업무로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다들 속으론 책에 따라 사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쪽에 동의한다.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 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 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 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생기로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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